이재학 PD “판사가 노동자가 뭔지 도통 모르는 것 같다”

미디어오늘 손가영기자
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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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학PD 진상보고서 종합 분석④] 형식 논리 갇힌 무성의·몰이해 7쪽 판결… 이재학 44개 증거 빼고, 청주방송 12개 증거만 반영

고 이재학 PD 노동자성은 공식적으로 두 번 확인됐다. 한 번은 2017년 청주방송 노무 컨설팅을 진행한 노무법인 유앤의 판단이다. 유앤은 청주방송 비정규직 23명 근무 실태를 분석해 이 PD의 노동자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나머지는 지난 22일 발표된 이재학 PD 사망 사건 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다. 대법원 판례에 비춰 이 PD가 청주방송에 종속된 직원과 같았다고 밝혔다.

법원만 반대였다. 이 PD의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2018년 9월~2020년 1월) 1심을 심리한 청주지법 정선오 판사(현 대전지법 부장판사)는 이 PD가 “청주방송 근로자라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PD가 모아 낸 44개 증거는 정 판사가 쓴 7쪽 판결문에 1건도 반영되지 않았다.

▲지난 1월22일 선고된 이재학 PD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1심 판결문 갈무리.

“회사 측 증거 보면…” 이재학 44개 증거 한 순간에 물거품

대법원은 노동자성을 판단할 때 형식이 아닌 실질을 보라고 판시했다. 계약 형식을 떠나 당사자가 임금을 목적으로 한 ‘종속 관계’에서 회사에 노동을 제공했는지 보라는 것이다. 종속 관계 판단은 성격에 따라 8개 쟁점으로 나뉜다. △업무 내용을 회사(사용자)가 정하는지 △취업규칙 등 인사규정 적용을 받으며 회사의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는지 △회사가 근무 장소와 시간을 정해 구속하는지 △자기 작업 도구를 가지고, 제3자를 고용해 일을 시키는 등 독립 사업을 영위하는지 등이다.

이재학 PD는 이를 증명하려고 5개월 동안 44개 증거를 모아 법원에 냈다. 대부분 자신이 청주방송 PD로 오랜 기간 간주됐고 정규직 PD와 다를 바 없이 일했으며, 관리자의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으면서 일했다는 증거다.

증거 위에 자신과 동료들 증언을 보탰다. 14여년 동안 청주방송 소유 장비를 썼고 거의 모든 연 소득을 청주방송에서 벌었으며, 정직원처럼 일했다는 증언이다. 취업규칙 적용, 근태관리 유무 등을 따지는 기준은 이 PD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 정직원처럼 출·퇴근했다. 그렇지 않으면 즉시 해고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이런 입장도 법원에 밝혔다.

▲이재학 PD가 법원에 문서제출명령을 거듭 신청했던 문서. 2017년 청주방송의 컨설팅 의뢰를 받아 노무법인 유앤이 조사 후 작성한 결과 보고서다. 붉은 네모 안이 이재학 PD와 관련된 내용이다.

 

정 판사는 이를 한 마디 문장으로 잘랐다. “회사가 낸 12개 증거와 회사 측 증인의 증언과 이 PD 과세정보를 봤을 때” 이 PD가 낸 44개 증거 내용은 노동자성을 입증하기 부족하다는 문장이다.

바로 다음 “이 PD 주장은 더 살펴볼 필요 없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덧붙였다. 꼼꼼하게 노동자성을 분석한 판결문이나 노동위원회 판정서를 보면 수쪽에 걸쳐 당사자 업무 이력과 내용, 사내 지위 등을 정리한다. 정 판사 판결문엔 그가 어떤 프로그램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 PD가 낸 44개 문건은 구체적 판단도 받지 못하고 물거품이 됐다.

▲이재학 PD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1심 판결문 중 법리 판단 시작 부분. '을'은 청주방송이고, '갑'이 이재학 PD다.


“AD는 프리랜서가 맡는 게 일반적”이라는 판사

정 판사는 이어 판단 이유 6가지를 밝힌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연출(AD)에 대한 판단이다. 청주방송은 이 PD가 AD였다고 주장했다. 정 판사는 이를 수긍했고, CP(책임피디)와 PD(연출), AD 업무 차이를 설명한 뒤 “AD는 정규직원이 아닌 프리랜서가 담당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적었다.

판사는 관행과 원칙 차이를 혼동했다. AD가 프리랜서로 일하는 건 방송사 관행이지 노동법 준수 여부는 따져볼 문제다. 이미 청주방송 AD가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사례도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2013년 청주방송 AD였던 고 이윤재씨가 입사 10개월 만에 사망한 사고를 과로사로 인정했다. ‘이씨는 프리랜서 계약을 했다’며 노동자성을 부인한 근로복지공단 판단을 뒤집었다. (서울행정법원 2013구합7810)

정 판사가 이재학 PD를 ‘AD’라고 규정한 것도 논란이다. 이 PD 주장을 면밀히 검토 않고 청주방송 측 주장만 반영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재학 PD는 2004년부터 6년 동안 AD 생활을 하고 이후 7년을 AD·PD로 동시에 일했다. 진상조사위가 확인한 내용이다.

▲2017년 'TV여행 아름다운 충북' 연출을 맡은 이재학 PD. 이 PD를 이 당시 '쇼 뮤직파워' 연출을 동시에 맡으면서 3개 프로그램 조연출도 병행했다.
▲이재학 PD와 함께 일했던 스태프가 법정에 제출할 용으로 써준 진술서.

정 판사는 이어 이 PD가 출·퇴근 의무, 취업규칙 적용 등 근태관리에 구속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회사 일을 자율적으로 맡을 수 있으므로 청주방송 관리·감독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이 PD 동료 직원들은 출장이 없는 한 이 PD가 대부분 오전 7시께, 늦어도 9시에 출근했다고 밝혔다. 이 PD 근태는 청주방송 프로그램 제작 일정에 구속됐다. 또 정규직 PD들도 프로그램에 따라 자율로 출·퇴근 시간을 정했다. 나아가 이 PD의 해고 직전 7년간 소득 대부분이 청주방송에서 나왔다. 과도한 업무량 탓에 다른 방송사 제작 일을 할 수 없었다.

정 판사는 이 PD가 정규직과 다른 방식으로 보수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4대 보험 등이 가입되지 않았음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개인사업자가 내는 세금을 계속 납부해왔다는 이유도 댔다. 이 PD가 14년간 청주방송 장비만 주로 썼다는 주장엔 ‘일부 제공한 건 사실이나 업무 편의를 위해 그렇게 했을 수 있다’고 일축했다.

정 판사가 판결문에 적은 이유 대부분이 대법원 판례 취지에 어긋난다. 대법원은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해졌는지, 근로소득세를 원천징수했는지, 4대 보험(사회보장제도)에 근로자로 가입했는지 등 사정은 회사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임의로 정할 여지가 크다”며 이런 이유로 노동자성을 쉽게 부정해선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무성의한 한 줄 “증인 안 나와서 진술서 신빙성 못 믿어”

정 판사는 청주방송이 이 PD 노동자성과 관련된 핵심 증거를 제출하라는 법원 명령에 따르지 않았는데도 불리하게 해석하지 않았다. 문서 제출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법원은 그 문서 존재에 관한 신청인 주장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고 이재학 PD 촬영 모습.

핵심 증거는 이 PD의 노동자성이 높다고 분석된 ‘청주방송 비정규직 실태 컨설팅’(2017년 노무법인 유앤 작성) 보고서다. 이 PD는 이 자료를 전제로 말하는 청주방송 직원의 음성을 녹음해 제출했고, 차라리 노무법인에서 직접 문서를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법원은 이 PD 요청은 묵살하고 ‘가지고 있지 않다’는 청주방송 답변만 들었다. 지난 3월 진상조사위는 쉽게 관련 자료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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