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희수 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 활동가
벌써 여름이 왔나 싶다가도 얼마 못 가 외투를 집어 든다. 기록적인 폭염과 가뭄, 한파, 폭우 등으로 우리는 전에 없던 생소한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 사회의 변화와 현상에 늘 촉수를 세우고 있는 기자들은 기후 문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기후는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 2017년 수습기자 시절, 연이은 폭염으로 거리에서 폐지 줍던 어르신이 길가에 쓰러져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때는 지병이나 연령 같은 개인의 특성을 알아보는 데 집중했다.
안타깝게도 그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번에는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던 이주노동자가 쓰러져 사망했다. 사건 장소를 갔는데 비닐하우스 안은 그야말로 고온의 불가마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날씨였다. 야외에서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을 잠깐 촬영하는데도, 땀이 비 오듯 쏟아져서 눈을 뜰 수 없는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해 충북 지역에는 예측하지 못한 국지성 폭우도 쏟아졌다. 당연히 대비는 안 되어 있었고, 도심과 농촌 할 것 없이 모든 게 물에 잠겼다. 떠밀리고, 깔리고, 떠내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상 기후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계절·야외노동자를 만나 상황을 알리고, 쪽방촌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쉴 곳을 마련하고, 각 가정에 선풍기를 지급하는 방안이 나왔지만 사후적 방식으로는 직면한 커다란 위기를 해결할 수 없었다. 결국은 손쉬운 ‘빈곤 포르노’에 지나지 않는다는 무거운 마음도 떨치기 힘들었다. 기후위기의 분명한 목격자임에도 오늘의 현장을 다뤄야 하는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구체적인 삶과 거대담론을 연결하는 통찰력이나 상상력이 부족했던 것도 있다.
우리 충북민언련은 지난 14일 세종시에서 열렸던 4·14 기후정의파업에 다녀왔다. ‘기후정의’ 운동은 기후위기가 자연 현상이 아닌 사회적 문제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넓게는 경제 대국, 좁게는 기업 등 온실가스를 집중적으로 배출하며 막대한 이윤을 취하는 집단이 따로 있지만, 피해는 가난한 나라나 취약한 서민들이 고스란히 받는 현상을 부정의로 규정한다.(한재각) 폭염 시즌 공장을 풀가동해 에어컨을 찍어내고 부를 축적하는 대기업 총수들보다 전기세 부담에 에어컨을 틀지 못하고 버티는 서민들이 더 큰 책임을 지는 건 불평등하다는 단순한 논리다. 14일에는 각자의 일터에서 노동과 생산을 위한 탄소 배출을 멈추고 정부와 기업에 목소리를 전하러 정부기관 앞에 모인 것이다.
세종에서 분주히 취재를 다니는 아는 얼굴들을 보니 반가웠다. 하는 일이 이거다보니 다른 현장에서도 시민들이 언론을 어떻게 인식하고 기사를 활용하는지 유심히 지켜보게 된다. 기사를 안 보는 것 같아도 다 본다. 파업이 끝나고 참여자들은 기사와 포토뉴스를 공유했다. 얼마나 충실히 다루었는지, 관점은 어떤지, 언론사마다 기사마다 비평의 장이 열린다. 여러 언론이 파업의 취지를 설명하고 현장의 생생한 장면을 포착해 기사로 내보냈다. 그렇지 않은 보도도 있었다. TV조선 뉴스9 리포트에서는 <낙서·스티커에 점령된 세종 관가…환경 망친 ‘환경 시위대’>라는 제목으로 “‘환경을 위한 집회가 맞나’ 의문이 들었”다고 전했다. 유감스럽게도 14일은 환경보호가 아닌 기후정의를 위한 집회였다. 대단한 분석 기사는 못 내더라도 집회가 왜 열린 것인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기자로서, 언론으로서 최소한 파악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출처: 한국기자협회(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53472)
계희수 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 활동가
벌써 여름이 왔나 싶다가도 얼마 못 가 외투를 집어 든다. 기록적인 폭염과 가뭄, 한파, 폭우 등으로 우리는 전에 없던 생소한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 사회의 변화와 현상에 늘 촉수를 세우고 있는 기자들은 기후 문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기후는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 2017년 수습기자 시절, 연이은 폭염으로 거리에서 폐지 줍던 어르신이 길가에 쓰러져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때는 지병이나 연령 같은 개인의 특성을 알아보는 데 집중했다.
안타깝게도 그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번에는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던 이주노동자가 쓰러져 사망했다. 사건 장소를 갔는데 비닐하우스 안은 그야말로 고온의 불가마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날씨였다. 야외에서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을 잠깐 촬영하는데도, 땀이 비 오듯 쏟아져서 눈을 뜰 수 없는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해 충북 지역에는 예측하지 못한 국지성 폭우도 쏟아졌다. 당연히 대비는 안 되어 있었고, 도심과 농촌 할 것 없이 모든 게 물에 잠겼다. 떠밀리고, 깔리고, 떠내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상 기후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계절·야외노동자를 만나 상황을 알리고, 쪽방촌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쉴 곳을 마련하고, 각 가정에 선풍기를 지급하는 방안이 나왔지만 사후적 방식으로는 직면한 커다란 위기를 해결할 수 없었다. 결국은 손쉬운 ‘빈곤 포르노’에 지나지 않는다는 무거운 마음도 떨치기 힘들었다. 기후위기의 분명한 목격자임에도 오늘의 현장을 다뤄야 하는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구체적인 삶과 거대담론을 연결하는 통찰력이나 상상력이 부족했던 것도 있다.
우리 충북민언련은 지난 14일 세종시에서 열렸던 4·14 기후정의파업에 다녀왔다. ‘기후정의’ 운동은 기후위기가 자연 현상이 아닌 사회적 문제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넓게는 경제 대국, 좁게는 기업 등 온실가스를 집중적으로 배출하며 막대한 이윤을 취하는 집단이 따로 있지만, 피해는 가난한 나라나 취약한 서민들이 고스란히 받는 현상을 부정의로 규정한다.(한재각) 폭염 시즌 공장을 풀가동해 에어컨을 찍어내고 부를 축적하는 대기업 총수들보다 전기세 부담에 에어컨을 틀지 못하고 버티는 서민들이 더 큰 책임을 지는 건 불평등하다는 단순한 논리다. 14일에는 각자의 일터에서 노동과 생산을 위한 탄소 배출을 멈추고 정부와 기업에 목소리를 전하러 정부기관 앞에 모인 것이다.
세종에서 분주히 취재를 다니는 아는 얼굴들을 보니 반가웠다. 하는 일이 이거다보니 다른 현장에서도 시민들이 언론을 어떻게 인식하고 기사를 활용하는지 유심히 지켜보게 된다. 기사를 안 보는 것 같아도 다 본다. 파업이 끝나고 참여자들은 기사와 포토뉴스를 공유했다. 얼마나 충실히 다루었는지, 관점은 어떤지, 언론사마다 기사마다 비평의 장이 열린다. 여러 언론이 파업의 취지를 설명하고 현장의 생생한 장면을 포착해 기사로 내보냈다. 그렇지 않은 보도도 있었다. TV조선 뉴스9 리포트에서는 <낙서·스티커에 점령된 세종 관가…환경 망친 ‘환경 시위대’>라는 제목으로 “‘환경을 위한 집회가 맞나’ 의문이 들었”다고 전했다. 유감스럽게도 14일은 환경보호가 아닌 기후정의를 위한 집회였다. 대단한 분석 기사는 못 내더라도 집회가 왜 열린 것인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기자로서, 언론으로서 최소한 파악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출처: 한국기자협회(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53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