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처음

이은규
2019-05-14
조회수 411

[오후3시의 글쓰기]

기대하지 않겠다고 장담을 했다. 상처받기 싫어서, 실망하기 싫어서 나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거짓말이었다. 나는 늘 기대를 했고 지금도 기대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정치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고 힘없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나아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대조차 접으라 한다. 매번 이런 식 이었다. 지금은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지금은 안보가 우선이라고, 그리고 지금은 국가위기라고...지난날의 꿈은 헛된 꿈에 불과하다며 현실을 모르는 순정한 바보들이라고 심지어는 상습 시위꾼들이라며 목청껏 고함지르고 저주의 손가락질을 해댄다. 왜 이러한 상황이 반복이 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잠꼬대처럼 혁명이라는 낡은 언어를 곱씹어 보지만 그도 이미 죽은 언어가 된지 오래다.

역사를 생각한다. 인간의 역사. 처음 꿈을 꾼 사람은 아마도 먼저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를 따라 꿈을 꾼 사람들은 조금씩 다른 말들을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가 너무 과격했어. 그러니 좀 더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그래도 이들은 꿈을 간직했다. 그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침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꿈을 비웃고 탄압하는 사람들, 그들은 침묵하는 사람들에게 협박을 했을 것이다. “헛된 꿈을 꾸면 너희들도 무참히 당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역사는 더디게 더디게 타협의 길을 걸어왔다. 꿈을 꾸되 그것은 과격하고 현실성이 없으니 적당히 침묵하는 다수와 기득권을 가진 소수들을 안심시키는 선에서 말이다. 그래서 침묵하는 다수는 자손들을 번성시켰으며 기득권을 가진 소수자들은 자자손손 황금인맥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디더라도 진보해왔으니 다행이라고? 아니다. 그 다행스러운 진보의 과실도 무임승차하는 기득권들과 침묵하는 사람들이 누리고 있다. 꿈꾸지 않고 모든 것을 차지하는 기이한 현상이라니. 이것이 민주주의라면 쓰레기통에 처 박야 할 것이다.

“나서지 말아라. 너만 다친다.”, “똑똑한 척 하지 말아라.”,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대충 살아라. 너만 생각해라.” 등등 셀 수 없는 보신의 언어와 불의에 대한 무관심이 지혜와 철학인양 고상하게 교양되어 왔다. 옛날 고리적 이야기라고? 아니다. 지금 이 현실이 대한민국, 지금 여기 현실이다. 침묵하는 다수와 기득권의 동맹이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채로 꿈을 유린하고 있다. 거대 기득권 양당이 번갈아 가며 정권을 차지할 뿐 삼성은 이재용이고 엘지는 구씨일가의 것이며 에스케이는 최씨 것임은 변치 않고 있다. 그리고 세상은 이들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그에 기생하는 미디어와 출세에 목마른 사람들이 부역하는 세상...꿈이 들어 설 자리가 없다. 꿈을 말하면 선동이라며 고립시킨다. 공화국의 헌법이 동원되고 온갖 혐오가 덧씌워져 옥중에 갇힌다. 자 그러니 출세하고 먹고 살려면 침묵해라.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꿈은 다만 꿈일 뿐, 그들이 누려야 할 권리는 언제나 나중이다. 무정한 침묵과 무참한 욕망 앞에서 말이다. 하나를 줄 테니 아홉을 인정해라. 이것이 부자들의 법칙이다. 그러나 그 하나도 법과 규칙으로 숨통을 쥐어 놓았으니 모든 것은 부자들 마음대로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 당장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분노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분노는 꿈꾸는 사람의 특권이라 말하고 싶다.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머리를 맞대고 더 깊은 민주주의를 향해 한걸음을 딛기 위한 실천을 모색할 때다. 다시 처음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오후3시의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고, 말하고, 글쓰기를 하는 모임입니다. 내 삶을 나만의 언어로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후 3시의 글쓰기 모임에서 생산한 다양한 글들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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