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3시의 글쓰기]
“저 망할 놈의 새끼, 인두겁을 쓰고 어찌 저러는지 몰라? 저런 종자들은 고자를 만들어버려야 해!” TV 뉴스에서 강간범, 성폭행, 성추행 등 이러저러한 추악한 단어들이 나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늘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러고 나서 혼잣말로 “남자든 여자든 네 몸 내 몸 할 것 없이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데...”로 끝맺는다. 화가 나서 쌍소리를 하고나서 씁쓸한 마음에 이르면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학창시절 뭔지 모르지만, 느끼함을 풍기는 남자선생님이 간혹 있었다. 느끼하다고 기억하는 것은 간혹 출몰하는 그들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일 테다. 그들 기준에 사소했을지 모를 장난스런 행동이 돌이켜보면 성추행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예쁘고 귀여운 여자 아이들의 볼이나 겨드랑이 살을 꼬집는다든가, 귀를 만진다든가, 등을 쓰다듬는다든가. 뉴스를 볼 때면 그로부터 30여년의 세월이 지나 내 나이 사십 중반이건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그대로임을 확인한다. 그러니 ‘저 망할 놈의 새끼’가 입에서 튀어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안희정의 성폭력사건, 안태근의 성폭력사건, 수많은 미투 사건들을 보면서 나는 여전히 한숨과 함께 쌍소리를 해댄다. 그런데 내 지근거리에 있는 누군가가 미투의 가해자이거나 피해자라면 어찌할 것인가? 물론 드러난 일들도 있고 드러나지 않은 일들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그런 일이 없길 바라는 마음 간절한 일들에 대해 듣게 되었다. 주변에서 일어난 일은 내가 제 3자의 입장에서 듣게 되는 뉴스 속 이야기의 분노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 중의 일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해야 하는 그들의 실질적인 걱정과 가까운 이들로부터 부딪히는 싸늘한 편견의 민낯은 분노를 넘어 서글픈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일이라는 것이 고작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분노하고 그들이 받을 상처가 덜 하길 바라는 마음뿐이라니... 위로랍시고 내가 건네는 몇 마디의 말조차 오지랖으로 느껴졌다. 가해자와 그 주변인의 태도에 토악질이 나올 정도였지만 거기까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에서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자각과 함께 스스로 무기력함을 마주한 잔인한 일이었다.
잔인한 일을 마주하게 된 나는, 안희정 성폭력사건의 재판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한 권김헌영 <그 남자들의 ‘여자문제’> 책에서 언급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은 오히려 1심 판결이 매우 부당하다며 분개한 반면, 운동 사회 내부에서 혹은 그 언저리에서 한국 사회 제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시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헌신적인 지역 활동가이자 인권운동가인 여성들이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 판단하기를 매우 어려워했다.’의 지적처럼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진실로 너는 행동하는 자인가? 어쩌면 머리로만 진보를 논하고 입으로만 세상을 바꿔야한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의와 원칙을 이야기하면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해 설령, 진보적 판단을 할지라도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에 주저함은 없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그녀의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에 공감했으나 무기력했고 그녀의 서글픈 눈물에 내 가슴이 아팠으나 위로의 말 한마디조차도 오지랖이라고 느꼈겠지 싶다. 분노했다면, 슬픔에 공감했다면, 그녀의 눈물이 내 눈물이라 여겼다면 그녀가 용기를 내도록 옆에 서서 함께 걷길 자청했어야 하지 않을까.
[오후3시의 글쓰기]
“저 망할 놈의 새끼, 인두겁을 쓰고 어찌 저러는지 몰라? 저런 종자들은 고자를 만들어버려야 해!” TV 뉴스에서 강간범, 성폭행, 성추행 등 이러저러한 추악한 단어들이 나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늘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러고 나서 혼잣말로 “남자든 여자든 네 몸 내 몸 할 것 없이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데...”로 끝맺는다. 화가 나서 쌍소리를 하고나서 씁쓸한 마음에 이르면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학창시절 뭔지 모르지만, 느끼함을 풍기는 남자선생님이 간혹 있었다. 느끼하다고 기억하는 것은 간혹 출몰하는 그들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일 테다. 그들 기준에 사소했을지 모를 장난스런 행동이 돌이켜보면 성추행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예쁘고 귀여운 여자 아이들의 볼이나 겨드랑이 살을 꼬집는다든가, 귀를 만진다든가, 등을 쓰다듬는다든가. 뉴스를 볼 때면 그로부터 30여년의 세월이 지나 내 나이 사십 중반이건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그대로임을 확인한다. 그러니 ‘저 망할 놈의 새끼’가 입에서 튀어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안희정의 성폭력사건, 안태근의 성폭력사건, 수많은 미투 사건들을 보면서 나는 여전히 한숨과 함께 쌍소리를 해댄다. 그런데 내 지근거리에 있는 누군가가 미투의 가해자이거나 피해자라면 어찌할 것인가? 물론 드러난 일들도 있고 드러나지 않은 일들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그런 일이 없길 바라는 마음 간절한 일들에 대해 듣게 되었다. 주변에서 일어난 일은 내가 제 3자의 입장에서 듣게 되는 뉴스 속 이야기의 분노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 중의 일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해야 하는 그들의 실질적인 걱정과 가까운 이들로부터 부딪히는 싸늘한 편견의 민낯은 분노를 넘어 서글픈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일이라는 것이 고작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분노하고 그들이 받을 상처가 덜 하길 바라는 마음뿐이라니... 위로랍시고 내가 건네는 몇 마디의 말조차 오지랖으로 느껴졌다. 가해자와 그 주변인의 태도에 토악질이 나올 정도였지만 거기까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에서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자각과 함께 스스로 무기력함을 마주한 잔인한 일이었다.
잔인한 일을 마주하게 된 나는, 안희정 성폭력사건의 재판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한 권김헌영 <그 남자들의 ‘여자문제’> 책에서 언급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은 오히려 1심 판결이 매우 부당하다며 분개한 반면, 운동 사회 내부에서 혹은 그 언저리에서 한국 사회 제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시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헌신적인 지역 활동가이자 인권운동가인 여성들이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 판단하기를 매우 어려워했다.’의 지적처럼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진실로 너는 행동하는 자인가? 어쩌면 머리로만 진보를 논하고 입으로만 세상을 바꿔야한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의와 원칙을 이야기하면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해 설령, 진보적 판단을 할지라도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에 주저함은 없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그녀의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에 공감했으나 무기력했고 그녀의 서글픈 눈물에 내 가슴이 아팠으나 위로의 말 한마디조차도 오지랖이라고 느꼈겠지 싶다. 분노했다면, 슬픔에 공감했다면, 그녀의 눈물이 내 눈물이라 여겼다면 그녀가 용기를 내도록 옆에 서서 함께 걷길 자청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