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를 보았다. 그전에 영화 리뷰를 보았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으며 연출과 연기에 있어 압도적인 찬사를 받았다는 뉴스도 접했다. 영화를 관람하기 전 나는 비교적 꼼꼼하게 영화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는 편이다. 감독은? 연기자는? 그리고 장르는? 조커를 선택하게 된 것은 단연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잭 니콜슨과 히스 레저의 조커가 인상 깊었으나 악역이라는 편견을 앞세운 선입견이 온전히 조커를 이해하기에는 큰 걸림돌이었다. 어쨌든 베트맨이 주인공이며 그를 돋보이게 하는 악역, 조커는 편견을 갖기에 충분했기에.
주인공과 악역이라는 이분법은 세상을 단순하게 편 갈라 세우게 한다. 마치 태초부터 주인공과 악역은 정해져 있다는 듯이. 주인공의 일거수 일투족에는 정당성이 부여되고 행여 그 정당성이 훼손되더라도 인정하고 이해하며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반면 악역은 그가 어쩌다 행한 동정과 연민 그리고 고뇌를 싸이코패스의 기이한 행실로 여기며 가차 없이 비난한다. 세상에 주인공, 이를테면 선한 주연과 악한 조연은 따로 없다. 함부로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없듯이 정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여서도 안된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역시 대단했다. 감독의 연출은 더 할 나위 없이 완벽했으며 배우의 연기를 빛나게 하는 음악까지 꼼꼼하게 꽉 채운 영화다운 영화다. 영화라는 판타지 세계에서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영화 조커는 명작의 반열에 올라설 것임에 틀림없다. 찰리 채플린과 영화 모던 타임즈가 자연스럽게 소환되고 그에 따른 시대적 역설을 능글맞게 반추해내는 감독의 탁월함이 영화 곳곳에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채플린이 풍자한 세상은 웃음과 슬픔을 통해 모두에게 공감할 수 있는 감동을 주었지만 조커의 세상은 웃음도 슬픔도 없는 누구와도 공감할 수 없는 적막함만이 있다. 아무도 사려 깊게 들으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조롱당하고 폭행당하는 혼자만의 세상에서 아서플렉은 기꺼이 조커로 탄생한다.
영화 밖 현실에서 나를 돌아본다. 나 역시 아닌 척, 불감한 척 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럼에도 말이다.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했다. 슈퍼캣이 지배하는 박쥐같은 무정한 세상에서 아서플랙과 나는 도망가지 말아야 했다. 아닌 척, 행복한 척, 웃는 척하며 버티지 말고 저항했어야 했다. 세상이 아무리 억누르고 가두려 해도 쫄지 말아야 했다. 인간은 인간으로 탄생했어야 했다. 가면을 쓴 주연이나 조연이 아니라. 아무리 힘없는 당위라도 그것이 인간의 역사가 쌓아온 ‘인간다움’이라는 실체이다.
영화를 보며 조커의 탄생서사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힘있는 것들에 대한 관용은 힘없는 것들에 대한 매몰찬 괄시로 돌아오는 현실 앞에서 힘없는 자, 누군들 영화 속 조커에 감응하지 않으랴. 조커를 동정하며 그 유명한 계단씬에서 조커의 춤을 찬양하는 나. 마치 내가 영화 속 조커가 된 것 마냥 해방감과 환희에 몰입되었다. 순정한 악당 조커의 탄생에 이리 공감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간 아서플랙이 저렇게 춤출 수 있었다면 그리고 춤추는 날이 많았다면 조커의 길을 택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서플랙이 끝내 놓아버린 메마른 희망에 숨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위에서 온전한 나를 건사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인간과 세상에 민감하게 감응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유하는 인간의 길, 인간으로 거듭나는 좁고 험한 길이 아닐까? 영화 조커는 흔들리는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고 해법을 찾아 길을 나서게 한다. 오이디푸스처럼.
[오후세시의 글쓰기]영화 리뷰 '조커'
조커를 보았다. 그전에 영화 리뷰를 보았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으며 연출과 연기에 있어 압도적인 찬사를 받았다는 뉴스도 접했다. 영화를 관람하기 전 나는 비교적 꼼꼼하게 영화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는 편이다. 감독은? 연기자는? 그리고 장르는? 조커를 선택하게 된 것은 단연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잭 니콜슨과 히스 레저의 조커가 인상 깊었으나 악역이라는 편견을 앞세운 선입견이 온전히 조커를 이해하기에는 큰 걸림돌이었다. 어쨌든 베트맨이 주인공이며 그를 돋보이게 하는 악역, 조커는 편견을 갖기에 충분했기에.
주인공과 악역이라는 이분법은 세상을 단순하게 편 갈라 세우게 한다. 마치 태초부터 주인공과 악역은 정해져 있다는 듯이. 주인공의 일거수 일투족에는 정당성이 부여되고 행여 그 정당성이 훼손되더라도 인정하고 이해하며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반면 악역은 그가 어쩌다 행한 동정과 연민 그리고 고뇌를 싸이코패스의 기이한 행실로 여기며 가차 없이 비난한다. 세상에 주인공, 이를테면 선한 주연과 악한 조연은 따로 없다. 함부로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없듯이 정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여서도 안된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역시 대단했다. 감독의 연출은 더 할 나위 없이 완벽했으며 배우의 연기를 빛나게 하는 음악까지 꼼꼼하게 꽉 채운 영화다운 영화다. 영화라는 판타지 세계에서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영화 조커는 명작의 반열에 올라설 것임에 틀림없다. 찰리 채플린과 영화 모던 타임즈가 자연스럽게 소환되고 그에 따른 시대적 역설을 능글맞게 반추해내는 감독의 탁월함이 영화 곳곳에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채플린이 풍자한 세상은 웃음과 슬픔을 통해 모두에게 공감할 수 있는 감동을 주었지만 조커의 세상은 웃음도 슬픔도 없는 누구와도 공감할 수 없는 적막함만이 있다. 아무도 사려 깊게 들으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조롱당하고 폭행당하는 혼자만의 세상에서 아서플렉은 기꺼이 조커로 탄생한다.
영화 밖 현실에서 나를 돌아본다. 나 역시 아닌 척, 불감한 척 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럼에도 말이다.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했다. 슈퍼캣이 지배하는 박쥐같은 무정한 세상에서 아서플랙과 나는 도망가지 말아야 했다. 아닌 척, 행복한 척, 웃는 척하며 버티지 말고 저항했어야 했다. 세상이 아무리 억누르고 가두려 해도 쫄지 말아야 했다. 인간은 인간으로 탄생했어야 했다. 가면을 쓴 주연이나 조연이 아니라. 아무리 힘없는 당위라도 그것이 인간의 역사가 쌓아온 ‘인간다움’이라는 실체이다.
영화를 보며 조커의 탄생서사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힘있는 것들에 대한 관용은 힘없는 것들에 대한 매몰찬 괄시로 돌아오는 현실 앞에서 힘없는 자, 누군들 영화 속 조커에 감응하지 않으랴. 조커를 동정하며 그 유명한 계단씬에서 조커의 춤을 찬양하는 나. 마치 내가 영화 속 조커가 된 것 마냥 해방감과 환희에 몰입되었다. 순정한 악당 조커의 탄생에 이리 공감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간 아서플랙이 저렇게 춤출 수 있었다면 그리고 춤추는 날이 많았다면 조커의 길을 택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서플랙이 끝내 놓아버린 메마른 희망에 숨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위에서 온전한 나를 건사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인간과 세상에 민감하게 감응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유하는 인간의 길, 인간으로 거듭나는 좁고 험한 길이 아닐까? 영화 조커는 흔들리는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고 해법을 찾아 길을 나서게 한다. 오이디푸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