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파티

심웅섭
201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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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시작한 동해안 자전거 여행, 오늘은 화진포에서 속초까지 70여km를 달릴 예정이다. 느지막한 아침을 먹고 10시쯤에 자전거에 오른다. 묵직한 다리의 감각이 짜릿하다. 초가을 오전의 햇살과 살랑거리는 바닷바람, 파란 가을 하늘과 철썩이는 파도소리, 거기에 점점 가빠지는 내 숨소리...... 가슴 벅찬 행복감이 밀려온다. 아, 정말 이대로가 좋다.

동해안 자전거도로는 통일전망대에서 삼척까지 242km에 걸쳐 동해안을 따라 만들어져있다. 그런데 이 자전거길이 정겹고도 아기자기하다. 때로는 한적한 아스팔트길로, 때로는 시멘트 농로 길과 비포장 오솔길로, 또 때로는 호숫가의 솔밭사이 숲길로 이어지며 아름다운 풍경들을 내 눈앞에 펼쳐준다. 길가에는 해당화와 달개비와 이름 모를 가을꽃들이 피어있다. 논길을 달릴 때면 벼가 익어가는 알싸한 향기가, 들깨 밭을 지날 때면 들깨의 고소한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공짜로 달리다니, 이런 행복감을 거저 맛보다니, 참으로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

공짜는 이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철지난 바닷가라더니, 한적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해수욕장은 우리 부자의 산책만을 기다리고 있다. 입장료도 주차료도 없다. 저녁 무렵이 되어 텐트를 치려고보니 오토캠핑장이 공짜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님이 없어서 관리인이 자리를 비운 것이지만 어쨌든 공짜인 셈이다. 돈을 내야하는 샤워장은 문을 닫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는다. 관광지 곳곳에 호텔급 샤워장과 핸드폰 충전소가 무료로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간판은 회장실로 표기) 물론 물을 뒤집어쓰는 샤워대신 수건에 물을 적셔 온몸을 닦아내는 수건목욕에, 머리를 숙여서 거리를 맞추어야 작동하는 헤어드라이어가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이것도 재미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저녁식사는 집에서 가져온 쌀과 밑반찬으로 상을 차리고, 거기에 감자와 양파를 썰어 넣고 된장국을 끓였다. 차려놓고 보니 반찬이 일곱 가지, 웬만한 한정식집이 이보다 나을까? 밤에는 또 심심할까봐 빗방울마저 심심찮게 내려준다. 텐트 안에서 듣는 빗소리가 멀리 파도 소리와 하모니를 이룬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주변에는 공짜가 참 많다. 아니 어쩌면 소중한 것일수록 공짜인지도 모르겠다. 따사로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 울창한 숲과 웅장한 명산들, 가족과 이웃끼리 나누는 끈끈한 정, 아니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랑받으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 삶조차도 누구에게 돈 내고 허락받는 일이 아니니 공짜다. 돈 내고 사야하는 것들이야 잠시는 갈증을 채워주지만 결국 쓰레기가 돼 버리고 마는 허접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엄청난 비밀을 오십 중반을 넘고서야 알아채다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나는 돈이 별로 없다. 적지 않은 월급이라지만 모으고 불리는 재주가 없다보니 달랑 집 한 채에 아이들 키워놓은 게 전부다. 이제 정년퇴직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노년을 여유롭게 보낼 노후자금도 없다. 그러나 별로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내게는 약간 우아한 거지 근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데서나 자리 펴고 밥을 해 먹거나 낮잠을 자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불편해서, 혹은 남의 시선이 창피해서 호텔은 못가더라도 펜션이나 민박집을 찾는다지만 나는 조금도 창피하지 않다. 자연이 준 소중한 공짜를 마다하고 굳이 기계가 만든 상품들을 소비하는 것으로 나의 위신을 지켜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적으면 적은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또 여유 있으면 여유 있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면 그만이다. 더구나 이렇게나 좋은 공짜가 지천이니 무슨 걱정을 또 할까? 남아있는 내 인생은 호사로운 공짜파티나 실컷 즐길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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