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이은규
201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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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의 눈]암살과 베테랑 사이

정말이지 징그럽게 더운 날들이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시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몹시 피곤한 시절이다. 멀쩡하게 걸려있는 달력을 가만히 응시해 보았다. “그래 입추가 멀지 않았구나.” 자연의 순리를 믿는(!) 나로서는 무례하고 징그러운 지금 이 더위를 참아보자고 스스로를 달래어 본다. 무더위를 피하는 한 방편으로는 영화관으로의 피신이 있다.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두세시간을 쾌적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상에 내 더운 혼을 실어 보내 이 육체가 블록버스터급으로 뽀송해진다면 참 좋을텐데...그것도 쉽지 않은 세상이 되어버렸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며 반영된 현실이라고 흔히 말한다. 땅에 발 딛지 않고 살고 있는 인간들이 없듯이 현실과 무관한 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 내용이 역사이거나, 공포거나, 판타지이건 간에 말이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만약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등에 사건과 이야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보는 이를 현혹하는 영상의 세계. 때로는 그 세계에서 사람들은 위로를 받고 상처를 받고 영감을 받기도 한다. 누군가 말했다. 영화는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이 말에 격렬하게 동의하며 경향신문에 실린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칼럼을 소개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최선은 상상할 수 있어도(늘 그랬듯 최선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고 그것마저도 법으로 단죄하는 시대) 최악은 가늠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어디쯤이 최악의 끝인지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흡사 영화에 관객처럼.

강유정은 말한다. “진정한 처벌은 피해자의 판타지가 아니라 가해자의 속죄일 것이다. 가해자들은 여전히 타인의 고통을 모른 채, 여전히 세속적 권력의 주인공인 세상, 속죄마저도 판타지인 세상이 아프다.” 그리고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서는 말한다. “그 사람이 만든 세상에서 어떻게 이깁니까? 난 인생 한번 사는데 저들은 두 번 세 번 살아 돈으로 덮고 힘으로 덮고 관계로 덮고!”

자연의 순리는 거스를 수 없다하더라도 영화와 드라마가 드러내는 이 세상을 어찌 해야 할까? 순진한 관객들이 이러한 세상을 들어낼 수 있을까? 나의 이 헛헛한 생각에 안옥윤이 대답한다.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매미 소리가 어깨를 짓누르는 여름이다. 입추에 바람은 언제쯤 당도할까?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암살’과 ‘베테랑’ 사이 - 속죄 없는 가해자

(기사바로가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7261513011&code=990100&s_code=ao186)

최동훈 감독 <암살>의 흥행세가 만만치 않다. 개봉한 지 4일이 지나지 않아 300만 이상의 관객이 찾았다는 소문이 들린다. <암살>은 최동훈 감독의 작품 가운데서 좀 독특한 위치에 놓인다. 대개 최동훈 영화의 주인공은 사리사욕을 최고로 치는 개인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다. <암살>로 치자면 상하이 시절의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이 바로 최동훈 영화의 전형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엔 사리사욕의 반대편 즉 공리와 대의를 아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나 하나의 목숨 따위는 초개와 같이 버리는 인물들, 그런 인물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암살>의 인물들은 윤리에 의해 차등지어진다. 적극적으로 항일하는 인물, 뼛속까지 항일하는 안옥윤이나 황덕삼 같은 인물이 가장 윗길에 있다. 그에 비해 속사포는 항일하기는 하되 개인의 이익도 챙기려는 현실주의자로 그려진다. 안옥윤의 정반대편에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인 친일 강인국이 있다. 그는 사리사욕의 감춰진 민낯을 보여주는데, 강인국의 사리사욕에는 가족도 혈육도 들어가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 강인국에게 사리사욕이란 혈혈단신을 위한 욕심이다.

안옥윤이나 황덕삼, 강인국은 영화적으로 보자면 평면적인 인물이다. 이 평면적 인물 곁에 두 명의 입체적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들이 꽤나 눈길을 끈다. 한 명은 자유분방한 무정부주의자에서 심정적 애국주의자로 바뀌는 하와이 피스톨이다. 그는 완전히 준비되지 않은 채 비분강개로 항일에 나섰다 극심한 자기부정에 빠진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결국 안옥윤의 항일을 돕는 인물로 바뀐다. 이 곁에 항일에서 부왜(附倭)로, 그리고 마침내 친일로 변절하는 인물 염석진이 있다. 그는 <암살>에서 가장 입체적이면서 한편 가장 드라마틱한 변신을 보여준다.

<암살>의 주제는 초지일관 영웅적인 항일인사나 파렴치한 평면적 친일파보다 변하는 두 인물의 행보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와이 피스톨이나 염석진은 모두 다 매우 사적인 이유로 마음과 행로를 바꾼다.

문제는 하와이 피스톨을 변하게 한 게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다면 염석진을 변하게 한 것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동정이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바로 이 두 가지 마음에서 변할 수 있다. 아픔을 느끼되 타인과 공감하느냐 아니면 오로지 자신만의 것에 전전긍긍하느냐가 바로 윤리와 파렴치를 나누는 근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최소 윤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연민에서 빚어진다. 타인과의 공감 능력을 잃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고통을 바라볼 때, 인간은 최소한의 윤리를 잃고 인간 이하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타인의 고통을 모르고 자신만 아픈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쉽사리 남을 버리고, 배신하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다. 이 이기심은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로, 독재정권하에서는 친정권으로 변형된다. 윤리가 없기 때문에 자기부정도 없고 죄책감도 없다. 더 큰 이익, 그것만이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할 유일한 수단이 될 뿐이다.

 

이러한 파렴치한은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에도 등장한다.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재벌가의 막내아들 조태오는 도무지 타인의 고통을 모른다. 영화에서 가장 폭력적인 장면은 감독이 공들여 연출한 액션 장면이 아니라 조태오가 남들의 고통을 실실 웃으며 바라보는 바로 그 장면이다. 조태오는 밀린 임금을 받으러 온 노동자에게 글러브를 던져주고는 맞는 만큼, 때리는 만큼 돈을 주겠다며 비웃는다. 더 세게 달려들라면서 운동선수 출신 경호원의 발목을 비튼다. 비트는 순간보다 그가 더 즐거워하는 것은 경호원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순간이다.

<베테랑>의 조태오는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초고도자본주의 사회의 결과물이다. 순종교배한 애완견이 지독한 유전병을 안고 태어나듯 조태오는 순종교배된 유전자 변형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기형적 산물로 묘사된다. 점점 더 많은 돈을 갖고, 점점 더 많은 힘을 갖지만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다. ‘돈’이라면 거의 모든 권력을 주무를 수 있기에, 이 웃자란 덧가지는 점점 더 커지기만 한다. 재벌 조태오는 피처럼 자기 돈을 아까워하면서 정당한 노동의 대가는 코웃음 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시기적으로 한 세기, 100년쯤이나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의 지독한 평면적 악인들이 공교롭게도 같은 대의명분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친일파 강인국은 이 모든 게 아무것도 없는 우리 민족을 위한 노력이라 읍소하고, 21세기 재벌 2세 조태오는 우리 그룹이 이 나라의 경제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돌아보라고 큰소리친다. 타인의 고통을 모르고, 자신만 아는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세우고, 우리 경제를 지탱한다. 역설적으로 말해 우리나라를 세우고, 우리 경제를 지탱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타인의 고통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강인국이나 조태오는 영화가 만들어낸 악인치고는 너무나 사실적이다. 기시감도 짙다. 남의 목숨은 초개처럼 여기고 자기 돈은 숭앙하는 자들, 물론 영화 속에서 친일파는 처단되고 오만한 재벌 2세는 자승자박에 무너진다. 하지만 이 통쾌한 사필귀정은 영화의 마지막 엔딩 약 5분간에만 유효한 것이 아닐까? 그 5분의 판타지만으로 그들의 잘못, 그들의 무자비한 이기주의가 심판받을 수 있는 것일까?

 간혹 영국이나 독일의 문학과 영화에서 부러운 것은 바로 가해자의 속죄서사가 발달해 있다는 것이다. 이언 매큐언 원작의 <어톤먼트>나 베른하르트 슐링크 원작의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주인공은 자의로 혹은 미필적 고의로 타인의 삶을 망가뜨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비록 당시엔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행동인지 몰랐으나 돌이켜보니 너무도 잔인한 일이었음을 깨닫고, 늦었지만 잘못을 고백하고 속죄를 청한다. 진정한 처벌은 피해자의 판타지가 아니라 가해자의 속죄일 것이다. 가해자들은 여전히 타인의 고통을 모른 채, 여전히 세속적 권력의 주인공인 세상, 속죄마저도 판타지인 세상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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