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 짧은 한복

연규민
2007-05-17
조회수 156

한길만은 긴급한 회의가 있었다. 내일 서울에서 대규모 집회가 있는데 길만이 소속한 노조의 청주지부에서도 많은 인원이 참석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 최종 점검을 위한 임원회의를 한다. 아침에 아내가 신신 당부를 했다. 오늘 오후 5시부터 큰애가 다니는 음악학원에서 음악당을 빌려 연주회를 하니 시간 맞춰 꼭 와야한다고. 아이도 아빠가 안 오면 안 된다고 난리다.

길만은 참 괴롭다. 오늘 회합에서 여러 가지를 준비해 줘야 하는 입장인데 빠질 수도 없고, 아이의 연주회에 안 갈 수도 없고... 내일 집회에 중요한 일이 있어 참석도 못하는데 준비모임에도 가지 않으면 비겁하게 겁이 나서 피했다는 비난을 피하기가 어렵다.

고민 끝에 일단 준비회의에 참석해서 사정을 얘기하고 일찍 나오기로 했다. 은행에 들러서 일단 20만원을 찾았다. 내일 길만이 참석해야 하는 모임에 10만원, 오늘 준비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위해 10만원씩 봉투를 두개 담았다. 전체 회의가 끝나고 분과별 회의를 시작하기 전 길만은 수석부위원장을 찾아가 봉투를 내밀었다. 부득이 내일 집회에 참석을 못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낼 행사경비에 조금이라도 보태라고 했다. 오늘도 집안에 급한 일이 있어 일찍 나가야 한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정말 동지들 볼 낯이 없다고 했다.

부위원장은 서운하다는 말은 하지 않고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협력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말해주는 수석부위원장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아내가 이렇게 많은 돈을 빼 쓴 걸 알면 난리 난다. 아내 별명이 옥소금이다. 이름이 소금옥인데 사람들이 짠순이인 아내를 놀리느라 옥소금이라고 부른다.

작은 아이의 옷을 예쁘게 입히고 길만은 양복 중에서 제일 흐름이 좋은 것으로 골라 입었다. 지난 해 서울에 진료를 받으러 갔다 시간이 남아 병원 근처 백화점에 구경을 하는데 맘에 드는 것이 있어 살펴보니 영국제품이었다. 가격은 보통 양복의 두 배였다.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점원이 다가왔다. 맘에 드냐고 묻길래 맘에는 들지만 너무 비싸서 사 입을 형편이 못된다고 했다.

아이엠에프의 영향으로 양복이 팔리질 않아 이제 문닫게 생겼다고 하면서 적당한 값에 가져가라고 한다. 세상에 백화점에서 물건값을 절반이나 깍아 보기는 머리털 나고 첨이다. 정말 옷이 좋다. 입어서 편하고 가볍다. 옷이 흐름이 좋아서 몸에 잘 맞는다. 잡지책에 나오는 양복모델보다 더 멋진 것 같다.

한껏 폼을 재고 음악당을 찾아 나섰다. 음악당이름은 <소리예술 예음>이다. 일단 뒷골목으로 들어가 어느 음식점 주차장에 차를 댔다. 그리고 다시 큰길로 나와 찾아보았다. 현수막에 조그마하게 교회 옆에 <소리예술 예음>이 있었다. 지하에 있는 교회였다. 평소에는 음악학원으로 사용하고 일요일에는 교회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예정시간이 지나고 20분쯤 뒤에 학원 원장이 나와 인사말을 하는데 전혀 교양이 없어 보였다. 아이들은 소란하고 어른들은 자기 아이를 찾아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여기저기서 사진 찍느라 음악을 듣는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놓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첼로를 배운지 두달 밖에 안되었다는데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무척 비싸 보이는 의상을 하고 나왔다. 길만의 앞을 가로막으며 디지털 캠코더까지 동원해서 부모는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다. 짜증이 도를 더해 간다.

드디어 길만의 큰 아이 국길의 차례가 되었다. 2년 전 아이 고모가 결혼하면서 사준 검은 양복이 조금 작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어울렸다. 머리에 젤을 바른 것도 분위기 있어 보였다. 그리이그의 솔베이지의 노래를 치고 들어갔다. 작은 아이 국인이가 국화꽃을 내밀었더니 큰놈이 받아들고 제 동생 등을 두드려 준다. 길만은 가슴이 흐뭇했다.



다음에 벨 연주가 있었다. 양손에 벨을 들고 자신의 음이 나올 때 흔들어 주는 것인데 참 볼만하다. 국길의 마지막 출연은 단소인데 단소연주는 평소 길만이 아들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때로 야단을 쳐가며 가르쳤더니 제법 민요와 동요를 분다. 여자아이들과 함께 연주를 하는데 모두 한복을 곱게 입고 나왔다.

그저께 저녁에 느닷없이 한복을 구해달라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 것이야 흔하지만 초등학교 5~6학년이 입을 한복은 가지고 있는 집이 없다. 사려고 물어보니 10만원 가까운 돈이 들었다. 한두번 입자고 그런 돈을 들일 수 없어서 그냥 돌아왔다. 결국 제 사촌이 입던 것을 빌려왔는데 너무 작았다. 소매끝이 팔꿈치에 닿았다. 뒷짐 지고 있다가 단소를 불때는 슬쩍 소매를 걷고 불라고 귀뜸을 해줬다.


국길이 무대에 올라 인사를 하는데 뒷짐을 지고 있던 팔을 앞으로 모으는 바람에 소매 짧은 것이 그대로 노출이 되었다. 객석 여기저기서 수근대더니 드디어 웃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국길은 태연하게 소매를 걷고 도라지타령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연주가 시작되자 웃음이 그쳤다. 자리로 돌아와서 국길은 제 부모를 보며 씽긋 웃고 잘했냐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해줬다.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한 척하는 큰 아들이 너무 대견했다.


주차장으로 가는 동안 여기 저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까 첼로를 연주하던 아이는 잠깐 무대에 서는데 안무비로 30만원, 의상비로 75만원, 메이크업 하는데 10만원이 들었단다. 그 부모들은 아이가 선생님들께 귀여움을 받고 학원에서 유명 스타가 됐는데 그런 비용이 뭐가 아까우냐고 한단다.

아는 학부모들이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하는 것을 사양하고 가족들을 차에 태워 대형 매장에 들어갔다. 거기서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사주고 절대 그런 음식을 먹지 않던 길만도 햄버거를 먹고 콜라를 마셨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다. 금옥은 아직까지 아무 말이 없다.

아무 소리하지 않고 장을 보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도 많이 샀다. 그리고 소주 안주 될만한 것도 샀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길만은 금옥과 마주앉았다. 소주에다 솔향이 나는 감식초를 타서 마시면 독하지도 않고 향기가 좋아 술을 별로 안마시는 길만도 한두잔 정도는 마실 수 있다.

금옥은 얼마 전 열린 학예회 이야기를 했다. 리코더를 연주한 한 아이가 고급 연주복을 입고 현악4중주를 하는 친구들을 본 뒤 바이올린을 배우겠다고 졸라서 월 15만원하는 레슨을 시키기로 했단다. “선생님들도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은 특기를 뽐내는 잘 사는 집 아이들만 칭찬해 아이가 상처를 받은 것 같다”고 섭섭해하더란다.

이제 서서히 청주에서도 초등학교 학예회가 일부 부유층 학부모와 학생들의 ‘돈자랑 잔치’로 전락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단다. “심지어 일부 학교들은 발레, 오케스트라, 현대무용, 성악 등 ‘귀족 예능’ 위주로 행사 프로그램을 짜려고 해요. 보다 화려한 장기를 선보인 학생들에게 시상까지 해 학부모들의 그릇된 경쟁심을 부추기고 있는 거예요.”

서울 사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금옥은 계속 말을 이어간다. ‘돈자랑잔치’가 번지면서 서울시내 무대의상 업체와 무용교실 등은 ‘학예회 특수’ 까지 누리고 있대요. 일부 학부모들이 수십~수백만원 짜리 학예회용 의상을 앞다퉈 구입하고 안무 및 연주 특별 레슨에 거액을 선뜻 지불한다고 해요.

서울 종로에 있는 어떤 전통의상 제작업체는 들어오는 주문에 일일이 다 제작을 할 수 없을 정도래요. 최근 어떤 초등학생은 150만원을 내고 드라마 ‘여인천하’에 나오는 왕비의 대례머리를 하기도 했다잖아요.

지난 번 학예회 때 혜인이 엄마는 만원 짜리 꼭두각시한복을 빌려 입혔다가 혜인이가 풀이 죽어 얼마나 속상해 했는지 몰라요.

길만은 착잡했다. 아내가 그토록 짠순이로 굴면서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길만까지도 그런 그릇된 풍조에 딸려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만은 모처럼 폼을 잡고 아내에게 말을 했다. “‘귀족 학예회’는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 기회를 빼앗고 ‘비싼것=좋은것’이라는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고 있어요. 학예회에 대한 전반적인 재점검이 필요한 시점이야.”

깊어 가는 가을밤을 따라 착잡함도 깊어간다. 어디 이것이 교육만의 문제일까. 사회전체의 병이지. 노조활동도 단순히 임금인상이나 근무여건 개선에만 목청을 높일 것이 아니라 정부 정책이나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바른 목소리를 내야 해. 아무리 봉급을 많이 타고 근무환경이 좋아진다고 해도 사회가 썩고 병들면 결국 살기는 그만큼 힘들어지는 것이니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구김없이 자라주는 아이들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같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연규민님은 충북민언련 운영위원이며, 법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업 외에도 국악, 글쓰기, 수다에 능하시며, 공부방 아이들과 늘 함께하고 있습니다. 자식문제, 정치문제, 종교문제 등 그야말로 세상 사는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 편집자주>  
0